폐암 4기 소식을 들은 가족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함께한 3일이 제게 남긴 것

폐암이라는 말을 들었던 날 저는 한국에 있었고 제 가족은 미국에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약 30년을 생활했습니다. 한국에는 처음부터 암 치료를 받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코로나를 앓은 뒤 왼쪽 갈비뼈 아래쪽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고, 미국 내과를 찾아갔지만 당시에는 갈비뼈 쪽 문제일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마침 한국에 올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선택이 제 생활을 완전히 바꾸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건강검진에서 폐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큰 병원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흉수를 빼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흉수에서 암세포가 확인됐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 PET-CT와 조직검사를 받았고 결국 폐암 4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한국에 있었지만 제 머릿속에는 미국에 있는 가족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아내가 있었고 딸과 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폐암이라는 사실도 믿기 어려운데 그 이야기를 전화로 가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가족에게 암을 어떻게 알렸는지를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기존 글에서 이미 다뤘습니다.
이번에 기록하고 싶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제 폐암 소식을 들은 가족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던 약 3일의 시간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폐암 환자가 된 뒤 가족이라는 존재를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1.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가족 모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폐암 진단을 받은 뒤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이야기한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전화로 폐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날 딸은 출장을 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딸이 출장에서 돌아온 뒤 직접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도 결국 가족을 통해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이 과정을 지금 글로 적으면 몇 문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화 한 통이 평소와 전혀 달랐습니다.
미국에서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있는 것 자체는 저에게 아주 낯선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했고 한국에 가족과 친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환자가 된 상태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느낌이 달랐습니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가족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말하면 가족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가족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정작 저 자신도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정확히 모르던 때였습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고,
유전자검사를 하고,
어떤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제가 가족에게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저보다 더 멀리 있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병원에 있었고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은 제가 전화로 전하는 몇 마디를 통해 제 상황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암 진단은 환자 한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환자가 듣고,
가족이 다시 듣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그 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2. 약 2주 뒤 가족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폐암 소식을 알린 뒤 약 2주 정도 지나 가족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아내와 딸, 아들이었습니다.
저를 보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을지 짐작은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이 당시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대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가족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본 제 마음입니다.
전화나 영상통화로 보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가족을 보는 것은 달랐습니다.
폐암 진단을 받은 뒤 저는 계속 다음 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다음 검사를 해야 했고,
병원을 옮겨야 했고,
조직검사를 해야 했고,
유전자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오히려 감정을 깊게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폐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4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간 뒤 제가 했던 일은 인터넷으로 폐암 4기 생존기간과 생존율을 검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슬퍼하기보다 정보를 찾았습니다.
무서워하면서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한국에 와서 제 앞에 있는 모습을 보니 암이 병원 안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프면 가족의 생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가족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생활이 있었고,
딸에게는 자신의 일이 있었고,
아들은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족이 모두 일정을 바꿔 한국까지 왔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반가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폐암에 걸린 것이 제가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가족이 저 때문에 걱정하고 생활을 바꾸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암 치료에서 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감정 중 하나가 생겼습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드는 마음이었습니다.
3. 아들이 학교를 쉬고 일하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가족이 한국에 왔을 때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치료비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 건강보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입원과 검사, 수술 등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후 추가 유전자검사도 받게 됐고, 표적치료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약값 역시 비급여로 상당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 비용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산정특례와 치료비 관련 기존 글에서 이미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숫자를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가족의 반응입니다.
딸은 생활비를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학교를 잠시 쉬고 일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병 때문에 자기 대학생활을 멈추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아내는 아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저 역시 아들이 학교를 계속 다니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자녀의 계획까지 바뀌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암 진단 전에는 가족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암 진단 후에는 관계가 반대로 바뀌는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 변화는 생각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치료비 자체도 부담이었지만 가족에게 경제적인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지금도 이 부분은 제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폐암 치료를 이어가면서 저축한 돈을 많이 사용했고, 이전처럼 가족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 한편의 부담입니다.
그렇다고 이 글을 암환자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일반화하는 글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환자마다 경제적 상황도 다르고,
보험도 다르고,
가족관계도 다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암환자가 된 뒤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 실제 경험이었습니다.
4. 함께한 시간은 약 3일이었고,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이 한국에 머문 시간은 약 3일 정도였습니다.
길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짧은 방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그 시간이 중요했습니다.
무엇을 특별하게 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족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암이라는 말을 전화로 듣는 것과 실제로 저를 보는 것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시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겉으로 심하게 아파 보이지 않았습니다.
걸을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식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폐암 4기라는 말과 제 몸 상태가 잘 연결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가족이 저를 직접 보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는지는 제가 대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후 가족이 제 얼굴을 자주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약 3일 뒤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한국에 남았습니다.
이것이 제 치료생활에서 중요한 선택이 됐습니다.
미국에도 건강보험이 있었고 가족도 미국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받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검사와 진단이 빠르게 이어졌고 이미 저를 진료하고 있는 의료진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한 끝에 한국에서 치료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어느 나라의 의료가 더 좋다는 비교가 아닙니다.
제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에서 내린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저는 한국에서 치료를 이어갔습니다.
가족이 공항으로 떠난 뒤부터는 다시 현실적인 치료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진료 날짜를 확인하고,
검사를 받고,
약을 챙기고,
형님 집에서 생활하며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한국에 오기 전과 돌아간 뒤의 저는 조금 달랐습니다.
혼자 치료받고 있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 줄었습니다.
5.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거의 매일 영상통화를 하게 됐습니다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연스럽게 영상통화를 자주 하게 됐습니다.
특히 아내는 거의 매일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매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때?”
“밥은 먹었어?”
“병원은 언제 가?”
“걷기는 했어?”
암 진단 전이었다면 굳이 매일 확인하지 않았을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서 치료받고 가족이 미국에 있으니 영상통화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말로 “괜찮아”라고 하는 것보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가족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어떤 날에는 영상통화가 귀찮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가족이 걱정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영상통화가 제 일상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병원에 다녀온 날에는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별일 없는 날에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에게는 이런 평범한 대화가 중요합니다.
모든 통화가 암 이야기로 끝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이야기도 하고,
미국 생활 이야기도 하고,
제가 한국에서 무엇을 먹었는지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가족과의 통화가 제 상태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가족이 일상을 나누는 시간으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그 변화가 저는 좋았습니다.
폐암 환자라는 이유로 모든 대화의 중심에 암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가족이 다녀간 뒤 저는 치료를 혼자 받는 것과 혼자인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치료받는 동안 저는 대부분의 일반적인 외래진료를 혼자 다녔습니다.
형님 집에서 지냈고 병원은 버스를 이용해 다닐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검사 결과를 듣는 경우가 아니라면 혼자 병원에 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준비하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고,
검사를 받고,
진료를 받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저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암 치료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물리적으로는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병원에 가는 것과 혼자인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국에는 형님과 형수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님이 저와 함께 걷기도 했습니다.
미국에는 아내와 딸, 아들이 있었습니다.
거리는 멀었지만 거의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치료비가 많이 들던 시기에는 가족이 경제적인 도움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전에는 가족을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폐암 환자가 되고 나서는 제가 가족에게 기대는 순간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편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이어가면서 생각을 조금 바꾸려고 합니다.
가족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제가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제가 치료를 잘 받고,
식사를 하고,
걷고,
정해진 약을 복용하고,
검사를 받고,
가족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3일이었지만 저는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폐암 4기라는 말을 들은 뒤 가족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약 2주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었던 시간은 약 3일이었습니다.
시간만 보면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치료생활을 돌아보면 그 3일을 빼놓기 어렵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한국까지 왔다는 사실,
딸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말,
아들이 학교를 쉬고 일하겠다고 했던 말,
아내가 아들의 생각을 말렸던 일,
그리고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영상통화를 시작한 생활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암환자가 되고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치료비 때문이기도 했고,
가족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족에게 걱정을 주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마움도 그만큼 커졌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병원과 약만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머물 수 있게 해준 가족이 있었고,
미국에서 매일 연락해주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가족의 도움이 암 치료결과를 바꾼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학적인 의미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로 살아가는 하루를 견디는 과정에서 가족이 제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기록하고 싶은 것입니다.
폐암 진단 전에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살고,
각자 학교와 일을 다니고,
저녁이 되면 다시 만나는 것이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치료를 잘 이어가고,
언젠가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함께 여행도 가고,
다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저는 치료 중입니다.
정기적인 검사도 계속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을 제가 미리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폐암 4기라는 말을 들은 뒤 약 2주 만에 미국에서 날아와 저와 3일을 함께했던 가족의 모습은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저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병원에는 혼자 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혼자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혼자 약을 챙겨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멀리서 제 얼굴을 확인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암환자가 되고 나서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가족의 의미는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걱정하고, 함께 기다리고,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는 사람들.
지금 저에게 가족은 그런 존재입니다.
작성자 정보
이 글은 폐암 진단 후 실제 치료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환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진단과 검사, 치료 과정에서 직접 겪고 느낀 내용을 기록하며, 같은 상황을 경험하는 분들에게 작은 참고가 될 수 있도록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료정보 안내
이 글은 작성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일반적인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의료진의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암의 상태와 검사 방법, 치료 과정, 약물 복용 및 생활관리는 환자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개인의 진료와 치료에 관한 사항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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